- 슬리피지는 내가 기대한 가격과 실제 체결된 가격의 차이를 말합니다
- 호가창에는 가격대마다 물량이 정해져 있어서, 주문이 크면 다음 칸까지 먹고 올라갑니다
- 지정가는 가격을 지키고 시장가는 체결을 지킵니다 — 둘 중 하나만 고를 수 있습니다
매수 버튼을 누르기 직전 화면에는 분명 68,400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체결 내역을 열어 보니 평균 체결가가 68,530입니다. 주문이 잘못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이 차이를 부르는 이름이슬리피지, 영어로는 slippage입니다.
단어 자체가 미끄러짐이라는 뜻입니다. 주문을 넣은 시점의 가격에서 실제 체결 가격이 미끄러져 내려간(혹은 올라간) 정도를 가리킵니다. 체결이 될 때 눈에 보이는 수수료와 달리, 이 비용은 가격 안에 섞여서 들어옵니다. 그래서 얼마를 냈는지 따로 알려주는 항목이 없습니다.
이 글에서는 슬리피지의 뜻부터 시작해서, 호가창이 어떻게 생겼길래 이런 일이 생기는지, 어떤 상황에서 더 커지는지, 그리고 줄이려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순서대로 정리합니다.
슬리피지는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정의는 짧습니다. 주문을 낼 때 기대했던 가격과 실제로 체결된 평균 가격의 차이입니다. 68,400에 사려고 했는데 평균 68,530에 채워졌다면 슬리피지는 130이고, 비율로는 약 0.19%입니다. 금액이 아니라 퍼센트로 말하는 습관을 들이면 종목이 달라져도 비교가 됩니다.
여기서 기대했던 가격은 보통 주문을 넣는 순간 화면에 보이던 현재가를 뜻합니다. 방향도 정리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슬리피지는 항상 불리한 쪽으로만 생기는 건 아닙니다. 주문이 들어가는 찰나에 가격이 내 쪽으로 움직였다면 기대보다 좋은 가격에 채워지기도 합니다. 이걸 유리한 슬리피지라고 부릅니다. 다만 실전에서 체감되는 쪽은 압도적으로 불리한 경우입니다. 급하게 눌러야 하는 상황 자체가 대체로 가격이 내 반대편으로 달리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슬리피지는 주문 실수나 오류가 아닙니다. 호가창이라는 구조 위에서 시장가 주문이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이고, 없앨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크기를 관리하는 대상에 가깝습니다.
왜 내가 누른 가격에 체결되지 않나요?
호가창을 한 번 떠올려 보겠습니다. 거래 화면 옆에 숫자가 두 줄로 쌓여 있는 그 표입니다. 위쪽에는 팔겠다는 주문이, 아래쪽에는 사겠다는 주문이 가격대마다 물량과 함께 걸려 있습니다. 68,400에 0.4개, 68,410에 0.7개, 68,420에 0.3개 하는 식입니다. 중요한 건 가격 하나하나가 무한정 받아 주는 창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장가 주문은 지금 걸려 있는 물량을 위에서부터 먹어 나가는 방식으로 체결됩니다. 매수 시장가를 내면 가장 싼 매도 호가부터 차례로 가져갑니다. 내 주문이 0.3개라면 68,400 한 칸에서 다 끝납니다. 슬리피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주문이 2개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68,400에 있던 0.4개를 다 먹어도 1.6개가 남습니다. 남은 주문은 다음 칸인 68,410으로 올라가서 0.7개를 먹고, 그래도 0.9개가 남으면 다시 68,420으로 올라갑니다. 이렇게 칸을 밟고 올라가면서 필요한 수량을 채웁니다.
결과적으로 체결 내역에는 여러 가격이 섞여서 찍히고, 그걸 수량으로 가중 평균한 값이 내 평균 체결가가 됩니다. 시작한 가격보다 위쪽 호가들이 섞여 들어갔으니 평균은 당연히 밀립니다. 주문이 클수록 더 많은 칸을 밟게 되고, 밟은 칸이 많을수록 평균은 더 멀어집니다.
여기서 두 가지 성질이 따라 나옵니다. 첫째, 슬리피지는 주문 크기에 비례해서 커집니다. 같은 종목이라도 0.1개를 살 때와 10개를 살 때의 체감이 완전히 다릅니다. 둘째, 슬리피지는 내가 주문을 내는 순간 확정되는 값이 아닙니다. 체결이 진행되는 동안 호가창도 계속 바뀌기 때문에, 미리 계산해 둔 값과 결과가 어긋날 수 있습니다.
시장가 주문은 가격을 고르는 게 아니라 물량을 먹어 나가는 주문입니다.호가창의 한 칸이 받아 줄 수 있는 물량은 정해져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슬리피지가 커지나요?
첫 번째 변수는 호가 두께입니다. 흔히 유동성이라고 부르는 그 성질입니다. 각 가격 칸에 물량이 두툼하게 쌓여 있으면 웬만한 주문은 한두 칸 안에서 끝납니다. 거래가 활발한 대형 종목에서 슬리피지가 얇게 밀리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반대로 거래가 한산한 알트코인은 칸마다 물량이 듬성듬성합니다. 같은 금액을 넣어도 훨씬 많은 칸을 밟아야 채워집니다. 대형 종목에서 0.05%에 끝났을 주문이 한산한 종목에서는 1%를 넘게 밀리기도 합니다. 종목을 바꿨을 뿐인데 비용 구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호가 간격입니다. 가격 칸 사이의 최소 단위, 즉 틱 크기를 말합니다. 간격이 좁으면 한 칸 올라가도 손해가 작지만, 간격이 넓으면 한 칸만 밟아도 크게 밀립니다. 가격이 낮은 종목일수록 간격이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 번째는 변동성입니다. 주문을 눌러서 거래소 서버에 닿고 체결이 끝나기까지는 아주 짧지만 분명히 시간이 걸립니다. 평소에는 그 사이에 가격이 거의 안 움직이지만, 급등락 구간에서는 그 찰나에도 호가가 통째로 옮겨 갑니다. 내가 보던 호가창이 체결 시점에는 이미 사라진 화면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네 번째는 시간대와 이벤트입니다. 참가자가 적은 새벽 시간대나 연휴 구간에는 호가가 평소보다 얇아집니다. 주요 지표 발표 직후처럼 모두가 동시에 주문을 내는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호가가 잠깐 비는 그 틈에 시장가가 들어가면 평균이 크게 밀립니다.
지정가로 넣으면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요?
절반은 맞습니다. 지정가 주문에는 원칙적으로 슬리피지가 없습니다. 68,400에 사겠다고 지정하면 68,400보다 비싼 값에는 체결되지 않습니다. 가격을 내가 정하는 주문이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문제는 다른 쪽에 있습니다. 지정가는 체결이 안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적어 둔 가격까지 시세가 내려오지 않으면 주문은 호가창에 걸린 채로 남습니다. 가격이 그대로 올라가 버리면 사려던 자리를 통째로 놓칩니다. 손절을 하려던 상황이었다면 더 곤란해집니다.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손실이 커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선택은 맞바꿈입니다. 확실한 체결과 확실한 가격 중 하나만 고를 수 있습니다. 시장가는 체결을 보장하는 대신 가격을 양보하고, 지정가는 가격을 지키는 대신 체결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둘 다 가지는 주문 유형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주문 설계의 출발점입니다.
실전에서는 무엇이 더 아픈지로 고릅니다. 자리가 중요하면 지정가, 반드시 지금 빠져나와야 하면 시장가입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종목에서도 상황에 따라 다른 주문을 씁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스탑 주문에도 이 문제가 그대로 따라옵니다. 스탑은 정해 둔 가격에 닿으면 주문을 발동시키는 장치일 뿐이고, 발동된 뒤에는 시장가로 나가는 설정이 많습니다. 그래서 급락 구간에서는 스탑 가격과 실제 체결가가 크게 벌어질 수 있습니다. 주문의 종류별 성질은 지정가·시장가·스탑을 한 번에 다룬 글에 더 자세히 정리해 두었습니다.
슬리피지를 줄이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요?
첫째, 주문을 나눠서 넣습니다. 한 번에 다 밀어 넣으면 여러 칸을 연달아 밟지만, 몇 번으로 쪼개면 그 사이에 호가가 다시 채워질 시간이 생깁니다. 같은 총액이라도 평균 체결가가 눈에 띄게 달라집니다. 분할 진입을 기본으로 삼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습니다.
둘째, 거래가 한산한 시간대를 피합니다. 호가가 얇아지는 구간에서는 평소와 같은 크기의 주문도 더 많이 밀립니다. 굳이 지금 처리해야 할 이유가 없다면 거래가 활발해지는 시간대로 미루는 것만으로도 비용이 줄어듭니다.
셋째, 유동성이 얇은 종목에서 큰 시장가 주문을 쓰지 않습니다. 호가창을 먼저 열어 보고 각 칸에 쌓인 물량을 눈으로 확인하는 습관이 도움이 됩니다. 내 주문 크기가 최우선 호가 한두 칸의 물량보다 크다면 이미 밀릴 각오를 해야 하는 크기입니다.
넷째, 슬리피지 허용 범위 설정이 있으면 씁니다. 허용치를 정해 두면 그 범위를 벗어나는 체결은 거부됩니다. 예상치 못한 가격에 통째로 체결되는 사고를 막아 주는 안전장치입니다. 다만 앞에서 본 것처럼 너무 좁히면 체결 자체가 안 되므로 균형이 필요합니다.
다섯째, 지정가를 기본값으로 두고 시장가를 예외로 씁니다. 거래소에 따라서는 호가창에 주문을 걸어 두는 쪽에 수수료를 더 낮게 매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슬리피지를 따로 떼어 보지 말고보이지 않는 비용으로 묶어서 보는 편이 좋습니다. 거래마다 빠져나가는 수수료, 포지션을 들고 있는 동안 오가는 펀딩비, 그리고 체결 때마다 가격 안에 섞여 들어오는 슬리피지까지가 한 묶음입니다. 하나하나는 작아 보여도 거래 횟수가 늘어날수록 합계는 빠르게 커집니다. 매매 방식을 점검할 때 이 세 가지를 같이 계산해 보면 생각보다 큰 항목이라는 게 드러납니다.
- 슬리피지는 기대 가격과 평균 체결가의 차이입니다
- 호가창의 칸마다 물량이 있어 큰 시장가는 위로 밟고 올라갑니다
- 지정가와 시장가는 가격과 체결 중 하나를 고르는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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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정의형 글에서는 호가창을 정리할 예정입니다. 이번 글에서 여러 번 등장한 그 표를 한 칸씩 뜯어보면서, 매수·매도 물량이 어떻게 쌓이고 어떤 식으로 사라지는지를 읽는 순서를 다룰 차례입니다.
이 글은 특정 종목의 매수·매도를 권하는 글이 아니라 용어와 구조를 설명하는 자료입니다. 판단과 결과는 각자의 몫입니다.